여름의 끝자락, 신라의 숨결이 깃든 경주 남산의 칠불암 계곡은 짙은 녹음과 시원한 물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박철민은 친구들과 산행을 하던 중, 계곡의 이끼 낀 바위를 건너다 그만 발을 헛디뎌 거센 물살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바위에 다리를 심하게 부딪친 철민은 발목을 쓸 수 없었고, 고통스러운 신음만을 내뱉으며 물가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세 명의 여학생 무리가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다들 놀라 당황하는 사이, 중학생이었던 김은숙이 망설임 없이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다가왔습니다. 은숙은 침착하게 비상 구명대에 있던 약을 꺼내 철민의 상처를 소독하고 응급처치를 해냈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등산 지팡이를 철민의 손에 단단히 쥐여주며, 작은 어깨를 내어주었습니다.
"제 어깨를 잡으세요. 천천히 내려가면 할 수 있어요."
은숙의 다부진 부축과 등산 지팡이 덕분에 철민은 험한 산길을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날의 고마움은 자연스레 펜 끝으로 이어졌습니다. 중학생 소녀와 고등학생 소년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편지 속에는 학업에 대한 고민, 일상의 소소한 기쁨, 그리고 서로를 향한 풋풋한 응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봄날 같았던 교감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뚝 끊기고 말았습니다. 철민이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사이, 은숙의 답장이 오지 않기 시작한 것입니다. 철민은 닿지 않는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썼지만, 끝내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철민이는 재학중 군 입대와 제대, 그리고 복학 후에는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진 듯 보였습니다. 서로를 향한 걱정과 그리움은 어느새 6년이라는 긴 공백 속에서 차가운 원망과 오해로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6년 만의 목소리, 예고 없는 약속
시간이 무심히 흘러 2026년 5월의 어느 봄날, 일본 유학을 마치고 늠름한 청년이 되어 돌아온 철민의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철민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저… 은숙이에요. 김은숙."
거짓말처럼 6년 만에 걸려 온 전화였습니다.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철민은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짧은 침묵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서로의 생사만을 확인하듯 안부를 묻던 두 사람은 마침내 약속을 잡았습니다.
"7월 27일 오전 11시, 경주천년숲에서 만나."
약속을 정한 그날부터 7월이 오기까지, 철민의 시간은 오직 그날을 향해 흘러갔습니다. 왜 그렇게 갑자기 사라졌던 것인지, 혹시 나를 잊었던 것은 아닌지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갔습니다.
경주천년숲,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26년 7월 27일, 녹음이 우거진 경주천년숲은 한여름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푸르렀습니다. 11시 정각, 수많은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늘어선 산책로 한가운데서 두 사람은 마침내 마주 섰습니다.
6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성숙한 어른의 모습이 되어 있었지만, 얼굴에는 굳은 표정과 서먹함이 감돌았습니다.
"왜 그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진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결국 철민이 참아왔던 원망 섞인 물음을 먼저 던졌습니다. 그 말에 꼿꼿하게 서 있던 은숙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럴 수밖에 없었어."
은숙의 입에서 나온 6년 전의 진실은 철민의 가슴을 아프게 울렸습니다. 당시 은숙의 집안은 갑작스러운 부도를 맞았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험난한 시간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했던 어린 은숙에게, 서울로 대학을 간 철민과의 편지는 사치처럼 느껴졌고, 자신의 초라한 현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스스로 모든 연락을 끊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경주시내에서 디자이너 사업에 뛰어들었고, 신라인과 독특한 의류디자인 제작에 온 신경을 수년 간 쓰면서 이제는 성공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기에 비로소 연락이 통한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철민의 가슴을 짓누르던 원망은 봄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홀로 그 무거운 삶의 짐을 견뎌냈을 은숙을 생각하니, 오히려 지켜주지 못했다는 깊은 미안함이 밀려왔습니다.
영원을 약속하는 고백
오해가 풀리자 두 사람은 천년숲의 울창한 흙길을 나란히 걸으며 잃어버린 6년의 시간을 천천히 채워나갔습니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이 그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습니다.
걸음을 멈춘 철민이 은숙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원망이 아닌,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습니다.
"은숙아, 칠불암에서 네가 내게 상처를 치료해주었던 그날 기억해? 그 덕분에 내가 무사히 산을 내려올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너의 든든한 간호자가 되어 줄게."
철민은 조심스럽게 은숙의 손을 맞잡았습니다.
이리하야 경북천연숲에서 올 가을에는 웨딩마취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이상 끝)
'나의 문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불효자의 고향 추억 (8) | 2025.05.30 |
|---|---|
| 대구•경북의 노래, 고향의 노래 (5) | 2025.05.28 |
| 내 고향 성주 예찬(星州 禮讚) (6) | 2025.05.28 |
| 부지런 하자 (詩) (0) | 2025.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