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바람을 거역해서 향기를 낼 수 없지만, 선하고 어진 사람이 풍기는 향기는 바람을 거역하여 사방으로 번진다.

나의 문예

내 고향 성주 예찬(星州 禮讚)

가야돌 2025. 5. 28. 23:00

고향과 관광 사진(일부)

성주군 대가면 금산리 옛고향 사진(1960년대)
옛고향(1989년)
세종대왕 자(子) 태실
성주읍 전경(성주군 제공)
성주댐
성주군 가야산의 위용

 대구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 자동차를 이용하면 성주읍에 도착할 수 있다. 대구에서 직선으로 뻗은 달구벌 대로를 지나 달성군 다사읍을 거쳐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성주대교를 통과하여 선남면 다음에 성주읍에 닿는 국도 30호선이다. 또 신천대로를 이용하여 칠곡 지천과 왜관 우회도로를 거쳐 4차선 넒은 도로를 달리다보면 군 경계인 고개를 넘게 되고 성주 월항을 거치는 국도 33호선도 있다.

  대구에 인접하고 있는 성주, 내 고향이 옛날에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멀었는가.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성주대교는 없었으며, 왜관과 대구로 가는 길은 월항을 거쳐 높고 험한 재(속칭 다람쥐고개)를 넘어야 되고 차량 두 대가 겨우 통과 가능한 꼬불꼬불한 길 뿐이었다. 낙동강 뱃길은 인근 마을 주민만 이용할 정도였다.

 

  그 옛날 50∼60년 전에는 어떠했던가. 내가 태어난 대가면 금산리는 한국전쟁 상처가 곳곳이 남아 있었고, 마을 사람 대부분이 끼니만 겨우 이용할 수밖에 없는 춥고 가난한 산간 농촌마을이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께서는 한학(漢學)에 접하고 글을 많이 읽으셨기 때문인지 우리 형제들을 초등학교와 성주에 있는 중학교에 보내주셨다. 10리가 넘는 꽤나 먼 거리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왕복 20km(오십 리)가 되는 성주중학교를 걸어 다녔다. 1년에 10회 정도 시험을 치룰 때만 버스를 이용했다. 자갈밭길 좁은 신작로에는 미루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크게 자랐고, 늑대가 도로변 산에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가 하면, 귀신 나온다는 도로변 비각(碑閣)들과 전쟁 격전지 등을 지나칠 때면 몸이 오싹하며 간이 콩알만 하기도 했다. 그렇게 새벽별과 저녁달을 쳐다보며 3년을 보냈다. 특히 겨울 하교시 성주읍 내 거리를 빠져나올 때 밝은 전깃불 아래 상점의 먹을거리를 쳐다보노라면 너무나도 배도 고팠고 그들이 부럽기만 했다.

 

  그러나 나를 키워준 농촌마을은 마음까지 가난하지 않았다. 봄이면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진달래꽃, 버들강아지를 따 먹고 산나물 뿌리를 캐 먹었으며, 여름에는 친구들과 어울려서 못에 뛰어들어 멱을 감고 개울가에서 가재와 물고기도 잡는가 하면 모내기도 하고 소 풀도 베면서 보냈다.

  가을 맑은 날 학교에서 돌아오면 이웃 친구들과 뒷동산에 올라가 높고 높은 가야산을 쳐다보면서 누님이 적어온 노래가사를 같이 들여다보고 달 밝은 밤까지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겨울에는 나무땔감을 해오고, 썰매를 타다가 숫하게 빠지기도 했으며, 눈이 오면 참새도 잡고, 배고플 때가 되면 마당 구석에 깊이 묻어둔 무를 꺼내어 먹는 그 맛이 일품이었다.

  이렇게 전설 같은 사연들을 뒤로하고 고향을 까맣게 잊은 채 살기 바쁜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직장을 가지고 초등학교 졸업한지 2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고향과 모교와 스승도 찾고 초등학교 모임에 나가 작은 봉사도 하게 되었다.

  직장 퇴직 후에는 성주중고등학교 동창회 임원으로서 수차례 학교를 오가면서 백년설 기념비도 세우고 역사관 건립하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 성주중고등학교는 선후배님들과 선생님들의 열성으로 넒은 교정에 최신식 시설이 들어섰으며, 고등학교는 기숙사까지 갖춘 우수학교로 발전하고 있다.

 

  이제 성주는 낙후도시가 아니었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26만 평의 산업단지가 들어섰으며, 3년 후에는 2차 산업단지도 조성 되고 성주읍에서 고령까지 4차선 국도확장을 추진 중에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집산지 참외의 고장, 세종대왕 태실(胎室)과 한개마을, 성산동 고분(古墳) 등 많은 문화유적의 선비 고을, 그리고 영남의 이름난 명산 가야산과 불교문화와 포천계곡, 그 외에 성주 대다수 농업용수를 공급할 수 있는 성주호(星州湖) 등 관광자원이 풍부한 전원도시로 탈바꿈을 하고 있다.

 

  성주의 또 다른 과제가 있다하면 경제발전과 더불어 문화유적을 장기(長期) 개발, 관광화(觀光化)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느껴진다. 한 예를 든다면 고려말기 선비의 절개를 읊은 이조년(李兆年, 1269∼1343)님의 다정가(多情歌)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의 시조 구절의 현주소가 어디인가를 밝혀보고 찾을 수 없다면 연구하여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하얀 배꽃이 만발한 달밤, 바람이 불 때마다 물 위에 떨어져 유유히 흘러가는 낙화유수(落花流水), 우리들은 수백 년 전 그 때로 뒤돌아가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거친 마음을 수련해야 되지 않겠는가. 특히 그 분은 『고려 500년의 제1인자』라고 하였으며 5형제 모두 급제한 위대한 분이다.

     그리고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 선생께서 회연서원(檜淵書院) 백매원(白梅園)에서 우러러 보았던 가야산 영봉(靈峰) 자락에 매화(梅花)를 곳곳마다 심어 관광객을 맞이한다면 섬진강 유역의 매화단지가 부럽지 않으리라!

  어디 그뿐인가.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1879∼1962)선생 생가(生家)의 성역화,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 1792∼1872) 선생의 만귀정(晩歸亭) 주변 개발 등 관광 자원 개발은 수두룩하다.

 

  끝으로 나의 여생을 지켜줄 생활터전인 대구를 빠뜨리고 싶지 않다. 고향을 뒤로 하고 30 여 년간 직장 생활을 마무리한 후 제2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대구 땅, 여기에서도 고향과 인접한 나의 평생 터전이었기에 무척이나 사랑한다.

  달구벌 역사의 성지(聖地) 팔공산, 영남의 젖줄 낙동강, 달구벌을 보담아 지켜주는 대구 앞산, 대구의 심장부 중구 곳곳 남아 있는 선혈들이 피흘리시며 지킨 귀중한 유산들..... 신발이 수없이 닳도록 많이도 뛰어 다니면서 고마운 마음으로 가슴에 깊이 새기고 있다.

  성주와 대구, 그리고 조국 강토, 이러한 소중한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옛 선조들의 조국수호와 애국정신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들은 절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고향 성주!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꿈과 용기를 심어준 고향, 또한 내 자신을 오늘까지 먹고 입고 살게 뒷바라지 해준 제2의 고향 대구.......... 먼 훗날 발전을 거듭한 복지(福地)에서 나는 영원히 하늘을 날아다니며 보게 될 것이다.

(2017년 대구동우회지 기고 작품)

 

성주 유명 관광사진 이모저모(일부)

회연서원
한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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