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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자유게시판

6•25전쟁의 비극과 우리들의 각오

가야돌 2024. 2. 10. 23:54

대구현충원

 

Ⅰ. 서언(序言)

  우리가 살고 있는 조국(祖國)의 100여 년을 돌아보자. 부모세대를 비롯하여 동우회 대선배들은 역경을 딛고 살아온 시절이다. 자원도 부족한 좁은 땅에 끝없는 외세침략을 받으며 살아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의 속국에서 벗어나자 또다시 6.25라는 침략전쟁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되었다. 그로 인해, 세계 최빈국의 수준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러한 시련의 역사를 슬기롭게 이겨낸 결과, 이제는 눈부신 산업발달과 방위력 증강과 더불어 세계 6위의 강국이 되었다.

  이 같은 경우는 세계역사상 한국만이 유일하여 세계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한국의 발전상을 벤치마킹하고자 노력하는 나라가 점점 많아지고 있음이 사실이다.

  나는 6.25라는 처참한 전쟁의 현장을 어릴 적에 지켜보았다. 그때 그 시절의 상황을 모르는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어떤 자세와 각오로 조국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하는가를 살펴보면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Ⅱ. 6•25전쟁과 피난생활

1. 나의 고향

  내 고향은 경북 성주군 대가면 금산동 속칭 ‘웃상삼’이라는 산간벽촌이다.

  대가면은 군청 소재지 성주읍(1979년 성주면에서 읍으로 승격)에서 서편 가천면과 인접하여 동서로 길게 뻗어 완만한 구릉의 낮은 산과 비옥한 농경지로 되어 있다. 그중 금산동(후에 금산리로 개칭)은 대가면에서 가천면 쪽으로 2km 떨어져 산간에 산재한 5개 농촌 부락으로 구성, 웃상삼은 그 중 한 마을이다. 지금도 밀양 박씨 위주로 20여 세대(1950연대에는 40여 세대)가 살고 있다.

 

2. 6.25전쟁 초기 상황

  1950년 6월 24일 국군은 자정을 기해 그동안 유지하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농촌 모내기 지원으로 2주간 특별 휴가를 주었다. 특히 주말이라 외출을 많이 나가 전투 준비가 전연 되어 있지 않는 상태였다. 이때 김일성은 미 제국주의의 남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한다는 야욕으로 남한을 빼앗고자 전쟁을 발발시켰다. 625일 새벽, 북한군은 소련제 전차 242대를 앞세워 폭풍이라는 공격명령과 함께 서쪽 웅진반도,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앙양 등 11개 지점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북한 공군은 침략 첫날부터 소련제 전투기(Yak-9) 4대가 여의도비행장, 용산역, 김포비행장을 폭격하였다. 반면 국군은 탱크와 전투기는 전무했고 20여 대의 훈련용 연습기와 연락기가 전부였다.

한편 무초(John J Muccio) 미국 대사는 북한군의 남침 사실을 본국에 알렸으며, 현지시간 6월 25일 14시(한국시간 26일 새벽 4시) 유엔안보리가 소집되어 ‘북한군 전투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 요구’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6월 29일, 미국의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직권으로 맥아더 (Douglas MacArthur) 연합군사령관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목표 폭격 권한을 부여하였고, 일본에 있던 맥아더사령부 선발부대인 제24사단의 스미스부대가 7월 5일 오산(죽미령)에서 가지고 온 장갑차로 첫 교전을 벌였지만 탱크에게는 이길 수가 없었다.

 

  7월 7일, 유엔은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 부의 지휘 하에 둔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어서 미국을 비롯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을 편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사이 우리 국군의 전력은 매우 열악하여 북한군 6사단이 침공한 전라도 방면은 방어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마산 전투 이전까지 대규모 교전조차 없는 입장이었다. 7월 20일, 대전과 전주, 23 ~ 27일에는 광주, 여수까지 점령되었다. 방어선은 계속 밀려나 동남쪽은 낙동강 전선까지 닿게 되어 북한군은 국토 90%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8월 1일, 워커 8군사령관은 하동-거창-김천-함창-안동-영덕까지 이어지는 긴 방어선을 포기하고 낙동강 연안을 남북축선과 동서축선으로 새 방어선을 설정하여 왜관을 축으로 포항까지 Y선, 남쪽 함안까지 x선을 설정하였다.

북괴군 최대 남침선(인터넷 캡처)

 

3. 내 고향 성주

  전쟁 발발한지 한 달이 지나간 1950년 7월 하순부터 일 년 기간 동안 내가 살았던 고향의 전쟁 참화와 가족, 주위 사람들이 보고 들었던 사실들을 토대로 얘기하고자 한다.

 

  전쟁 발발의 비보가 이곳 산골 마을에도 전해왔고, 성주군으로부터 비행기 폭격이 있을 터이니 집집마다 방공호를 파도록 지시가 내렸다. 북한군이 발견되면 어느 곳이든 유엔군 측 비행기에서 폭격을 가하게 되니 비행기 소리만 나면 대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우리 마을에도 젊은 청년들은 즉시 징집되었고, 고등학생들도 타의 반, 자의 반 학도병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성주군 전체 징집된 학도병은 60여 명인데 전쟁 종식 후 돌아 온 사람은 극소수였다. 전투가 임박하자 낙동강변 지역과 성주면은 소개령이 떨어졌다. 피난 주민들은 낙동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거나, 우리들이 거주하고 있는 산간지방으로 피난을 오기도 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집 주변에 방공호를 만들어 피신했다.

 

  무더위가 찾아온 초여름 어느 날 아침, 논밭 건너 남쪽 앞산에서 황색 복장을 한 수많은 군인들이 짐을 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 당시 마을 사람들은 전쟁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곳 시골까지 적군들이 들이닥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주민들 모두 기겁을 하고 무서움에 떨면서 이들을 살펴보는 밖에 없었다. 마을 방어를 위한 단체나 국군이 있을 리 만무했고, 군청과 면 소재지에만 경찰이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수백 명 됨직한 이들이 논바닥에 모여 떠들어대는데 비로소 마을사람들은 한 달 전 북한에서 내려온 적군임을 알게 되었다.

훗날 자료를 통하여 알게 되었는데 3사단 소속이었다. 이들은 가장 먼저 서울에 입성했으며 김일성으로부터 ‘서울 3사단’이라는 칭호를 받은 강한 군대라고 했다.

 

1960년대 성주 대가 고향 마을 전경

 

4. 가족의 위기와 친척들의 비보(悲報)

북한군은 동네로 들어와 열을 지어 집을 쏘다니다 한 집마다 5∼6명씩 진을 치고 집 주인들에게 식사 차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여태껏 외지 사람들이 몰려와서 겁박하는 일을 단 한 번도 당해본 일이 없는 선량한 농촌 사람들이였기에 그들의 험악한 얼굴을 감히 쳐다볼 염두도 못 내고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이 점령한 며칠 후 나도 무서움에 떨면서 집 밖 외진 곳에서 동무들과 숨어 있었는데 당시 오래도록 키워온 큰 개가 보이지 않았다. 그 개는 집밖을 나갈 때 항상 나와 함께 길동무가 되어주어 큰 낙이였다.

나는 불길한 생각에 집에 들어갔더니 처참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북한군 서너 명이 개를 묶어 마당 끝 참나무 큰 가지에 거꾸로 매어 달고 개를 총대로 마구 패고 있었다. 나는 무서움도 잊은 채 고함을 지르면서 개를 잡는 그의 다리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때리지 마! 때리지 마!.....”

  그는 나를 군화발로 걷어찼고 나는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옆에 있던 자는 피식 웃으면서 총구를 내 눈 앞에 들여대고 고함을 질렀고, 어머니가 번개같이 달려와 나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피신한 후 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만약 어머니가 그들에게 나와 같이 계속 대들었다면 그 자리에서 참변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밭에 일을 하고 있었고, 형님은 산속에서 피신한 상태였다. 나는 펑펑 울면서 매일 나를 따르고 좋아 했던 개를 보았을 때 분노와 원망이 가득 찬 눈망울로 울부짖는 그 모습을 평생 동안 잊은 적이 없다. 누님도 멀리 떨어져 무서움에 떨면서 그 광경을 보고는 오늘 이날까지 단 한 번도 보신탕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타 지역에서도 자기들의 요구를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서슴없이 총살시켰다.

북한군이 며칠간 머무는 동안 평화롭게 살아오던 동네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서운 일들이 벌어졌다. 각 가정의 식량 탈취는 물론,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가축들을 순식간에 잡아 먹어치웠고, 소까지 잡았다고 한다.

 

  이튿날부터는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 마을 40여 호에 살고 있었던 20∼30대 청장년들은 이미 현역군 또는 국군 노무단원으로 징집되었으나 북한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하기 위한 자원 색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을 맡은 사람들은 완장을 차고 대상 집을 사흘이 멀다 하고 예고 없이 침입 하여 윽박질렀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같은 마을이나 인근 마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 뒤에 알고 보니 그들은 북한군 의용군으로 가입했거나 ‘국민보도연맹’이라고 하는데 정체를 철저하게 숨겼다.

 

  우리 집 학생인 형님을 끌어내기 위해 그들은 줄기차게 드나들었으며, 형님은 인근 산 속에서 숨어 있으면서 어머니가 밤마다 몰래 가져다주는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견뎌내고 있었다. 한번은 저녁에 집에 내려와 부엌에서 식사를 하려는 찰나 갑자기 그들이 들이닥쳤다. 형님은 부엌 뒤에 쌓여 있는 솔가지숲 안에 숨었고, 온 집안을 다 뒤지기도 했지만 들키지 않아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때 형님은 그들이 떠나간 뒤에 식사도 하지 않고 개울을 따라 산속으로 숨어 며칠 간 헤맸는데, 어머니도 숨은 장소를 찾지 못해 울면서 많이 애태웠다고 누님이 얘기하였다. 그 당시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북한군은 며칠 동안 우리 마을을 온갖 만행으로 쑥대밭을 만들고 떠나간 뒤 몇 사람은 북한군 총알받이로 끌려가거나 납북되었다고 하며, 북한군이 성주를 점령한 기간은 3개월 정도지만 선량한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만행들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고 한다.

 

  방공호는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언덕 밑을 파고 수시로 피신했는데, 먼 곳으로부터 날아오는 몸집이 큰 B-29, 쌕쌕이 또는 호주기라고 불렀던 제트 전투기(미국 록히드 F-80C 슈팅 스타 제트 전투기) 소리가 들리면 우리들은 근처에 놀다가 잽싸게 방공호에 숨어들었고, 아버지는 비탈진 숲속 밭이라서 괜찮다고 하면서 꾸준히 농사를 지었다. 성주면에서는 몇 차례 폭탄이 떨어졌지만 우리 마을 폭격은 없었다. 그러나 30여 km 이내에 있는 김천, 왜관, 낙동강변에 있는 선남면은 수개월 동안 밤낮으로 폭격소리가 들렸다.

  전쟁 후 성주군에서도 그 동안 수백 명의 희생이 뒤따랐는데 정부에서 보도연맹들을 집단 학살하라는 지시에 따라 260여 명이 이에 해당 되었다고 성주군지(星州郡誌)에서 밝혔다. 참고로 전국의 보도연맹 숫자는 조사기관마다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까지 나와 있어 정확한 인원수는 알 수가 한마을에 살았던 박성환 외사촌 형님께서는 전쟁이 발발하자 즉시 징집되어 일주일간 훈련을 끝내고 강원도 양구에서 전투 준비하던 중 적의 기습공격으로 같이 있던 국군들과 함께 모두 전사 하였다. 수개월이 지내서야 전사통지서를 받은 외숙모님은 미혼인 장남을 잃게 되자 평생 동안 한을 삭이지 못하고 제사 때마다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그 후 외삼촌께서도 일찍 세상을 떠나 남은 식구들의 삶은 항상 어려웠다. 지금 그 형님은 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친사촌 이용희 형님은 22세 때 군인으로 참전하여 복무 중 1년이 채 안 되어 북한으로 진격하다 다리에 여러 발의 총탄을 맞아 야전 병원에서 치료 받은 후 완치를 못한 채 의병제대를 하였다. 그 뒤 항상 심한 통증으로 고생을 하다가 63세에 별세 하여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묘역에 있다. 나는 지난 4월 대전국립현충원에 가서 참배하였다.

성주군 학도병 충훈비(성주중학교 교정)

 

5. 다부동 전투

  북한군 전선사령부가 있는 수안보에서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8월 1일, 워커 미 제8군사령관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8월 3일 아침 칠곡경찰서는 낙동강다리 안쪽 6km 이내 왜관 주민들과 성주군 선남면 주민들에게 오후 6시까지 전부 거주지역을 떠나도록 했다. 주민들은 읍사무소로부터 피난증을 교부 받아 대구, 경산, 청도, 밀양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같은 날 오후 8시 왜관교를 폭파 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8월 4일부터 5일까지 청송, 구미, 군위, 의성, 상주를 점령하였다. 그 중 북한군 제3사단은 8월 5일 낙동강 북부전선에서 낙동강을 도하하여 8월 13일 칠곡 석적으로 진격,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15연대가 위치한 328고지(칠곡 석적)를 공격하였다.

  이에 맞서 유엔군사령관은 미 극동공군사령관에게 국군 1사단 방어지역 좌측방, 즉 왜관교 북쪽을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1950년 8월 16일,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비행장에서 출격한 B-29 전략폭격기 98대가 이날 11시 58분부터 26분간 약목과 구미 사이 가로 5.6km 구역에 400~900㎏ 폭탄 960톤, 3,234개의 폭탄을 퍼부었다.(軍史 第13號 50p) 그 이후 한동안 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 방어지역에 대한 적의 포격은 현저하게 감소됐다.

 

 

  다부동 일원에서는 유학산, 328고지, 837고지, 674고지, 볼링장, 가산산성 전투 등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가운데서 837고지(유학산)는 대구 사수의 최고 요충지였고, 유학산은 아홉 번, 328고지(칠곡 석적)는 무려 열다섯 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훗날 알았지만 김천시는 공산치하 50일간 집중포화에 시가지 80%이상 파괴되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6. 6•25전쟁 피해 현황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1,129일간이다.

  한국군은 전사 137,899명과 부상, 실종, 포로를 포함 총 621,479명이고, 유엔군은 전사 37천여 명과 부상, 실종, 포로를 포함 151천여 명이다.  남한의 인명 피해는 사망, 학살 373천여 명과 부상, 납치, 행방불명 등 총 990만여 명, 피난민은 240만여 명, 미망인 20만여 명, 고아 10만여 명이다. 북한 총 사망, 부상, 및 행방불명 등 모두 150만 명으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 유엔 전사자 37천여 명 중 미국인 전사자가 36천여 명으로 가장 많다. 아이젠하워 원수를 비롯하여 장군의 아들 142명이 참전, 그 중 35명과 미국 최고 명문 하버드 학생 20명도 목숨을 바쳤다.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준 워커장군의 아들 샘 워커 중위도 한국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는데, 1950년 12월 23일, 아들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하기 위하여 의정부 미군부대를 향하여 찝차로 가던 중 한국군 트럭이 추돌하여 장군은 그 자리에서 순직하고 말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고를 낸 한국운전병을 처형하라고 지시하였으나 미 군사 고문관 만류로 3년 징역만 받았다. 그 후 한국정부에서 워커 장군을 기리고자 미군 휴양을 위한 ‘워커힐’호텔을 지었다.

 

 

Ⅲ. 우리의 자세와 전 국민의 안보태세 강화

1. 지역과 나라사랑 정신

   이제 30여 년 공직 생활을 큰 탈 없이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와 평생 살아온 긴 날들을 하나하나 들춰보면서 나름대로 뜻있게 생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중 행정동우회가 반평생 함께 지낸 동지들의 좋은 사랑방 역할을 해주고 있어 마음 든든하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1984년 100여 명으로 출범하여 현재에는 1천 명 이상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그것은 역대 회장님들을 비롯한 많은 회원들의 협력과 꾸준한 노력의 결과라고 본다. 또한 대구사랑운동의 일환으로 지역발전을 직접 둘러보는 대구 바로알기 현장 탐방, 봉사활동, 문화 탐방 등을 연중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시정홍보는 물론, 나라사랑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동우회 내에 ‘카페영상클럽’과 대구경북공무원공단 내 봉사단체인 ‘대경상록자원봉사단’이 있는데 충혼탑, 독립기념관, 전쟁기념관, 다부동전적기념관, 유적지 등 선혈들의 흔적을 두루 답사하여 동우회 카페와 유튜브에 올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외에도 우리 회원들은 세계문화유산 • 자연유산을 비롯하여 유교문화와 선비 정신 등이 보존된 서원, 사찰, 박물관, 문화유적지도 탐방하고 있으며, 자손들에게 이 모든 유산과 소중한 국토를 잘 물려주어야 하는 굳건한 자세와 함께 자긍심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청라언덕 3.1만세길

 

2. 안보태세 강화와 우리들의 자세

우리나라는 3년 간 남북 동포 1천만 명의 피해를 남긴 6•25전쟁이 아직도 휴전 상태에 있다. 정전 70년간 북한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위협과 피해를 주고 있음에도 지금 국민들의 안보 태세가 느슨한 감이 많아 전쟁을 겪어본 우리가 보기에는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인천에 있는 맥아더 동상을 무너뜨리자고 외치는 자가 생겨나고, 심지어 언론에서 6•25전쟁을 북침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 지난 10월, 2018년부터 5년 동안 병역 기피자가 1,397명이라고 발표하였고, 2015년~2020년 사이 오직 한국의 징병제 하나만의 이유 때문에 한국 국적을 포기한 사람이 3만 명이라고 한다. 이들이 전부 병역의 의무를 이행했다면 1개 군단 수준의 병력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세계 상당수 국가들은 군사 훈련과 안보태세에 온 힘을 쏟아 붓고 있는가 하면, 이미 몇 나라는 전쟁 참화 속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내고 있으며, 경제 빈국으로 끼니조차도 잇지 못하여 목숨을 걸고 외국으로 탈주를 계속하고 있는 나라들도 많다는 것을 전 세계인들은 두 눈으로 똑똑하게 보고 있다.

  6•25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가를 잘 알지 못할 것이다. 평화만이 살길이라고 말로만 외치면서 국가 수호 결의가 충만 되어 있지 못하고, 계속 국론분열이 일어난다면 국가와 국민들이 병들게 되고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에게 질병이 찾아오듯이 어떤 결과가 닥칠지 모를 일이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은 2021513일 임무를 마치고 한국을 떠나면서 "평시에 땀을 흘려야 전시에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다고 하였다.

 

  끝으로 우리 동우회원들은 다음 세 가지를 꺼내어 다짐해본다.

  첫째, 나와 가족들이 온전히 존재하고 있음은 우리 조상들과 부모님들이 희생으로 나라를 지켰기 때문임을 잊지 않아야 하며,

  둘째, 우리 모두는 자나 깨나 나라사랑 고장사랑으로 국가안보에 이바지할 것과,

  셋째는 자손들에게 국가를 소중하게 물려줄 수 있도록 앞장서고 실천하는 것이 절실한 자세라고 외쳐본다.

 

  나는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입구 조형물 중 석벽에 새겨진 다음 글귀를 절대 잊지 않고 있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

전쟁박물관 6.25전쟁 시 우리나라를 도와준  우방국가 깃발
전쟁박물관 입구에 만들어진 6.25 작품들

 

참고 문헌

1.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3. 6•25전쟁1129일(이중근 편저, 2014년, 우정문고)

4. 칠곡호국평화기념관 홍보문

5. 인터넷(네이버, 軍史, 국가기록원, 나무위키 외 다수)

 

2023년 12월

 

위 글은 대구행정동우회 2023년 제18호에 기고된 내용을 여기에 옮겨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