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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임고서원

가야돌 2018. 12. 30. 10:06

임고서원은 영천 임고면 양항리에 있으며

고려 말의 충신이자 유학자인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553년(명종 8)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1603년(선조 36)에 다시 지었으며,이때 임금으로부터 이름(임고)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643년(인조 21)에는 장현광(張顯光), 1727년(영조 3)에는 황보인(皇甫仁)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다가

1965년 정몽주의 위패만을 봉안하여 복원하였고, 2001년에는 황보인의 위패도 다시 배향하였다.

경내에는 묘우, 표충사, 내삼문, 유정문, 강당, 흥문당, 정몽주 신도비,

유물보호각 삼진각, 문루 영광루, 서재 함육재, 동재 수성재 등이 있다. 

서원 옆에는 숙식이 가능한 "임고서원충효문화수련원"이 설립되어 있는데

인성을 바탕으로한 자유학년제 진로체험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임고서원 선죽교 (모설)

-개성에 있는 선죽교를 본떠서 만든 임고서원 선죽교로

정몽주가 귀가 도중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등에게 격살 당한 곳이다-

서원 앞의 은행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63호, 수령 500여년)
영광루 서원 전경
서원 문루인 영광루
안에서 본 영광루
임고서원 전경(경상북도 시.도기념물 제62호)
임고서원과 강당인 홍문당 편액
서재인 함육재
동재인 수성재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
수련원안에 게시된 포은선생 사계절 시

1990년 임고서원성역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300여억원의 국비와 도.시비를 지원받아 문충사,유정문,강당 홍문당,

동재 수성재, 서재 함육재, 심진각, 진사청, 영광루 등을 건립하여 제도를 완비하고

신도비와 사적비를 세운 후 1999년 이안고유행사를 하였다

2004년 (사)포은선생 숭모사업회를 결성하여 국.도비와 영천시의 지원으로

포은 유물관과 충효관등의 강학시설과 동방이학지조 송탑비,조옹대,용연,포은선생숭모비,

선죽교 모설,단심가와 백로가 시비 등을 완비 2012년 5월 준공하였으며

또한 부설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을 설립하여

충,효,예의 포은정신을 일깨우는 전통문화체험 등 정신문화진작에 힘써고 있다

동방이학지조 송탑비와 정자

단심가와 백로가 시비

- 단심가는 포은선생의 최후 작품이며, 백로가는 포은 모친이 포은에게 경계로 지어준 시다 -

 

단심가(丹心歌) -포은 정몽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백로가(白鷺歌) -정몽주 자당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올 새라

청강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러일까 하노라

포은선생 숭모기념비

정몽주의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 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하였으며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포은은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도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은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임고서원 전경
포은 정몽주선생 초상

- 정몽주는 1337년 12월 무자일에 영천 우항리에서 태어났는데

모친인 영천이씨 부인이 임신중에 난초화분을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어 놀라 깨어나서 낳았기에  몽란이라 이름지어졌다가

9살 되던해에 어머니가 물레질을 하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검은 용이 뜰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올라 황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배를 따먹기에 

깜짝놀라 깨어나 뒤곁으로 가보니 포은 선생이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먹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꿈속에서 본 용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이름을 몽룡이라 고쳤다고 한다

또 관례를 치를 즈음에 이번에는 아버지 운관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기에 무릎을 꿇고 "어디서 오신 어른입니까? " 하고 물으니

"나는 주공(周公)이다. 그대 아들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소중한 사람이니

잘 길러야 할것이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꿈을 깬 운관공이 곧 관례를 치를것이니 아명을 버리고

꿈속에서 주공을 만났다하여 몽주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