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바람을 거역해서 향기를 낼 수 없지만, 선하고 어진 사람이 풍기는 향기는 바람을 거역하여 사방으로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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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 역사 속으로 ... ... (경주 기행)

가야돌 2017. 8. 28. 10:12


경주 남산동 동ㆍ서 삼층석탑(慶州 南山洞 東ㆍ西 三層石塔.보물  제124호.경북 경주시 남산동 227-3번지 )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건립된 특이한 예의 두 탑이다.
동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서탑은 전형적인 3층석탑의 양식이다. 동탑은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이 넓게 2중으로 깔려있고, 그 위에 잘 다듬은 돌 여덟개를 한 단처럼 짜 맞추어 기단부(基壇部)를 이루고 있다. 탑신부(塔身部)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돌 하나로 만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과 낙수면이 모전석탑처럼 똑같이 각각 5단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서탑은 위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2단의 기단은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돌 하나로 되어 있고 각 층에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쌍탑은 대체로 동일한 양식으로 만들어지는데 비해, 이 동·서 두 탑은 각각 양식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 흔치않은 모습이며,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마주 서있다. (출처:문화재청)

경주 傳 염불사지 삼층석탑(경주시  남산 봉구곡 자락 남산동 1130번지 傳염불사지)

염불사지 동탑은 삼층석탑으로 1973년 불국사역 광장으로 옮겨졌으나 2008년 초 원래 위치로 이전, 복원작업이 진행됐으며 서탑은 탑재들이 남아있는 현재 위치에 복원됐다.
동탑의 사리공은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2개이며 3층 탑신의 방형사리공이 뚫린 점 등으로 미뤄 7세기말 또는 8세기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傳염불사지에 대해『삼국유사』기록에 의하면 “한 스님이 하루에 몇 번씩 시간을 정해 염불을 외우셨으며, 법당에 앉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그 소리가 당시 서라벌 360방 17만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어 사람들은 그를 공경하여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는데 스님이 돌아가니 그의  초상을 흙으로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모시고 그가 살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고쳐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경주불국사경내(慶州佛國寺境內 사적 및 명승  제1호 )

경주 토함산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에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 석탑,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가 국보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비로전에 모신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극락전에 모신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유산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문화재정보센터)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 (慶州 西岳洞 三層石塔.보물  제65호.경북 경주시 서악동 705-1번지 )

통일신라시대 모전탑 계열에 속하는 탑으로, 무열왕릉 동북쪽 비탈진 곳에 서 있다. 모전탑은 전탑(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모방한 것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을 이른다.
기단(基壇)은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윗면에 1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데, 남산리 석탑에 3단의 층급이 있는 것에 비하면 간략화된 것이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큼직한 네모꼴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얇게 파서 문을 표시하였다. 문의 좌우에는 1구씩의 인왕상(仁王像)이 문을 향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하였으며, 처마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 탑은 독특한 기단 형식으로 미루어 보아 경주 남산동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제124호)을 모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남산리동삼층석탑이 기단 위에 3단의 층급을 둔 것에 비해 여기서는 1장의 돌로 이루어진 생략된 형식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퇴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석탑으로 추측된다. 각 층의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커서 균형이 맞지 않고 둔중한 느낌을 준다. (출처:문화재청)


경주 서출지(慶州 書出池.사적  제138호.경북 경주시 남산1길 17 (남산동) )

경주 남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연못이다.
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경주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궁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출처:문화재청)


이 못은 신라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신라 유적이다. 신라 소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 되던 해인 488년에 남산 기슭에 있었던 천천정에 거동하였을 때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가보라”고 하므로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가에 와서 두 마리의 돼가가 싸우고 있는 것에 정신이 파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주므로 왕게게 그 봉투를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거문고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분향하는 중이 궁주와 서로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궁중의 간계를 막았다는 뜻에서 못 이름을 서출지라 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1월 15일에 까마귀에 제사밥을 주는 오기일(烏忌日)의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문화재안내문에서) 


 신이담에 속하는 설화의 하나이다. 신라21대 소지왕 또는 비처왕이 즉위 10년에 못 속에서 나온 노인의 편지 때문에 죽을 위기를 넘겼다는 전설로 소지왕에 관한 인물 전설이면서,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서출지라는 못의 지명전설이기도 하다.<삼국유사>기이 제1 사금갑조에 실려 있다.<서출지>,<둘 죽이고 하나 살리기>. < 오곡밥 먹는 유래>라는 제목이 붙기도 한다. 현재 경주시일대에 구전되고 있으나, 보고된 자료는 많지 않다.

 소지왕이 정월보름에 천천정으로 행차하였다가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여, 기사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하였다. 기사는 도중에 돼지싸움을 구경하다가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 버렸다. 이때 못 가운데에서 한 노인이 나와 글을 쓴 봉투를 주길래 받아보니, 겉봉에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 열어보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이상히 여겨 그 봉투를 왕에게 바쳤더니,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열서 보지 않으려 하였으나, 일관이 "두 사람은 보통사람이고 한 사람은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니 열어보셔야 합니다."하고 아뢰므로 왕이 열어보니 "거문고갑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왕이 활로 거문고 갑을 쏘니 그안에 왕비와 정을 통하던 중이 있었다. 장차 왕을 해치려고 숨어 있던 차였다.왕은 중과 왕비를 함께 처형하였다. 이러한 일로 하여 매년 정월 상해일. 상자일. 상오일에는 모든 일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며, 정월 보름을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으며, 그 못을 서출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전설화에서는 소지왕대신 중국의 왕이나 막연하 왕이 등장하는데, 이 경우에는 못에서 나온 노인이나 간통하던 중이 없거나 갈등이라는 그 구실이 희미하게 된다. 그래서 종교적 사상간의 갈등이라는 의미가 약화되고 까마귀를 기리기 위하여 오곡밥을 먹게 되었다는 유래담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한편, 점쟁이가 보통사람에게 닥친 비슷한 위기를 해결해주었다는 이야기는 개인의 행운과 불운에 국한되어, 나라의 운수를 다툰<삼국유사>의 설화에 비하여, 그 의미의 폭이 좁아졌다. 이 설화에서 중요한 요소인 수수께끼는 그 해결과는 상관없이 사람이 죽게 되어 있는 '목수수께끼'의 일종이며, 일관이 풀었다는 것은 그 수수께끼가 사회적.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는 제의적 기능을 지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소지왕이 두 명을 죽이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풍속과 지명의 유래를 설명한 뒷부분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설화에 나타난 왕은 초월적 존재로부터 보호되는 신성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에게 닥친 위기를 모를 뿐만아니라 노옹의 계시가 뜻하는 바를 알지 못하는 존재여서 양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신이한 능력을 갖추고 건국신화에 등장하던 왕의 모습이 약화되어, 신의 능력과 인간의 능력을 분리시켜 인식하는 역사적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수 있다. 또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528년 이전에 일어난 토착신앙과 외래신앙 사이의 갈등양상이 나타난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당시 왕실과 불승의 관계, 왕에 대한 백성의 인식, 민속적 사실등을 연구하는데 있어 참고가 될만한 자료이다. (자료 출처 : 한국사전연구사간.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선덕여왕지기삼사설화(善德女王知幾三事說話.선덕여왕설화)에 등장하는 여근곡

 첫 번째 이야기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

 두 번째 이야기는 개구리 울음을 듣고 전쟁의 조짐을 미리 알아차린 일화

 세 번째 이야기는 여왕이 자신의 죽을 날을 예언한 일화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선덕왕(善德王)
636년 5월에 남산 궁궐 서남쪽 옥문지(玉門池)에 두꺼비들이 떼로 모였다. 임금이 그 사실을 듣고서 좌우를 보며 말하기를 "두꺼비(蝦蟇)들의 부릅뜬 눈은 성남 병사(兵士)들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서남쪽 변경(邊境)에 옥문곡(玉門谷)이라는 지명(地名)이 있다고 한다. 혹시 이웃나라 병사가 그 산 중으로 몰래 들어오지는 않았는가?"라고 하셨다. 이에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命)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곳을 수색하게 하였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려고 갑옷 입은 병사(甲士) 5백 명을 거느리고 여근곡에 와서 잠복해 있었다. 알천(閼川)이 기습 공격하여 모두 다 죽였다.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삼국유사 권제1 기이편(紀異篇)
신라 제27대 선덕왕의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중 두 번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철인데도 뭇 개구리들이 모여 3-4일 동안 울었다. 나라사람 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왕에게 물었다. 임금이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예(精銳) 군사 2천명을 이끌고 서쪽 근교(近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물어봐라. 반드시 적병들이 있을 것이니 기습해서 죽여라" 명을 받은 두 각간(角干)이 각각 군사 천 명을 이끌고 서쪽 교외(郊外)에 가서 물었다. 과연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에 백제 군사 5백 명이 숨어있었다.
백제 장군 우소(亐召)라는 자가 신라의 남산(南山) 영석(嶺石) 위에 매복해 있었다. [알천, 필탄이] 그를 포위하여 화살로 쏴 죽였다. 증원군(後兵) 1,200 명이 뒤 따라 오자 그들 역시 쳐서 죽였다.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부산(富山) 아래에 여근곡(女根谷)이 있었고, 신라 남산에 해당한다. 백제의 우소(亐召)가 신라 남산(南山:부산) 영석(嶺石) 위에 매복해 있었다.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일괄 (慶州 元聖王陵 石像 및 石柱一括.보물  제1427호.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 611-4)

사적 제26호 경주 원성왕릉을 중심으로 좌·우 입구에 한 쌍씩 석조상들이 배치 되어 있으며 수량은 문·무인 4점, 사자상 4점, 석주 2점으로 총 10점이다.
무인상은 서역인 또는 서역풍을 나타내고 있어서 동서문화의 교류적 측면에서 크게 중시되고 있는 자료이며, 통일신라시대 절정기의 사실적인 조각인 성덕대왕 능 석인상을 계승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된 상이다.
또한 이들 문·무인상들은 흥덕대왕 능의 석상들보다 앞선 생동감을 갖고 있고 역동적인 사실성을 나타낸 대표적인 조각품으로 신라 조각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아울러 8세기의 이상적 사실 조각과 함께 당대의 찬란한 신라 문화의 진수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문화재청)


경주 원성왕릉 (慶州 元聖王陵.사적  제26호.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능리 산17번지)

원성왕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한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성왕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문화재청) 것이다. 또한 각종 석물에서 보여지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출처:문화재청)

경주 성덕왕릉(慶州 聖德王陵.사적 제28호.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8)

경주에서 불국사 방향으로 가는 길의 동남쪽 구릉 소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1∼737)의 무덤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이 능은 밑둘레 46m 높이5m이다. 무덤 아래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높이 90㎝ 정도의 돌(면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있고 무덤 주위의 4모서리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석상 앞쪽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무인석 1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1개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에서 보이고 있는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慶州 南山 塔谷 磨崖佛像群.보물 제201호.경북 경주시 배반동 산72, 산79)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남쪽의 큰 바위에는 목조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석탑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면의 불상을 주존으로 하여 남향사찰을 경영했었음을 알 수 있다. 9m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불상을 회화적으로 묘사하였다. 남쪽 바위면에는 삼존과 독립된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고, 동쪽 바위면에도 불상과 보살, 승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을 표현해 놓았다. 불상·보살상 등은 모두 연꽃무늬를 조각한 대좌(臺座)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 한 광배(光背)를 갖추었으며 자세와 표정이 각기 다르다. 비천상은 하늘을 날고 승려는 불상과 보살에게 공양하는 자세이지만 모두 마멸이 심해 자세한 조각수법은 알 수 없다. 서쪽 바위면에는 석가가 그 아래에 앉아서 도를 깨쳤다는 나무인 보리수 2그루와 여래상이 있다.
하나의 바위면에 불상·비천·보살·승려·탑 등 다양한 모습들을 정성을 다하여 조각하였음은 장인의 머리속에 불교의 세계를 그리려는 뜻이 역력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조각양식은 많이 도식화되었으나 화려한 조각을 회화적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특이한 것이다. (문화재청 자료)

태종무열왕릉

구분: 능/묘 - 사적 제 20 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 문무왕

위치: 경주시 서악동 842

교통: 고속터미널 옆 사천교를 건너 삼거리에서 건천행 4번 국도를 따라 좌회전해 1.7km정도 가면 선도산 아래 태종무열왕릉에 이른다.시내에서 건천방면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20분 간격으로 다닌다.넓은 주차장은 있으나 그 밖의 시설은 없다. 선도산 아래 나지막한 송림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고분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능이다. 무열왕릉(武烈王陵)은 북서쪽에 위치한 해발 380미터인 선도산(仙桃山)에서 뻗어나온 각 지릉들로 감싸여 있으며, 앞에는 서천과 서악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배산임수지형을 하고 있다. 경주에 있는 많은 능 가운데 누구의 왕릉인지 단정할 만한 확증이 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 이 왕릉은 앞쪽에 태종무열왕릉비가 서 있어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인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무열왕은 신라 제25대인 진지왕 손자이다. 그의 어머니는 26대 진평왕의 딸이자 27대 선덕여왕의 동생이었다. 조부가 실정으로 4년만에 왕위에서 추방된 후, 직계손들은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당대 명장 김유신의 도움으로 진골 중에는 처음으로 보위에 등극하여 신라 제29대 왕이 되었고 재위동안에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원효와 인연을 맺은 이야기,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김유신의 누이와 혼인하게 된 이야기 등 무열왕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와 전설이 전한다. 김유신의 누이와 무열왕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30대 문무왕이다. 능은 원형 토분으로 둘레 100m, 높이 12m 이며, 봉분의 아래에는 자연석으로 축대처럼 쌓고 큰 돌을 드문드문 괴어 놓은 호석을 둘렀는데 지금은 괴어 놓은 큰 돌만 보인다. 이와 같은 호석 구조는 경주 시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고분의 호석 구조보다 한단계 발전한 형식이다. 능앞 비각에는 국보 25호로 지정된 신라 태종 무열왕릉비가 있는데,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난 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비신은 없어지고,비신을 받치고 있었던 귀부와 비신의 머리를 장식하였던 이수만 남아있다. 목을 길게 내밀고 등이 육각형의 귀갑으로 덮인 거북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웅건하게 조각된 귀부와 좌우 모두 여섯 용이 몸을 틀고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의 동감 넘치는 이수는 통일신라 초기 석조 예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 25호>

선도산 아래에 위치한 신라 제 29대 태종무열왕릉은 원형토분(圓形土墳)으로 둘레 110미터에 높이가 11미터에 이르고, 봉분(封墳) 밑변에 큰 돌을 심어 호석(護石)으로 삼은 형태의 능이다. 태종무열왕(654-661)은 신라 25대 진지왕(眞智王)의 손자이고, 이름은 춘추(春秋)인데 조부인 진지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4년만에 실정으로 왕위에서 밀려나면서 그 직계 후손(後孫)들은 왕위계승권 밖으로 잠시 밀려나는 듯했으나, 춘추공은 대망(大望)을 품은 김유신(金庾信)과 손을 잡으면서 왕좌(王座)에 올랐다. 김춘추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도 고구려, 일본, 당 등을 사행하면서 신라의 국제적 고립을 타개하는 외교에 심혈을 기울였고, 나당동맹을 성립시켜 통일을 위한 기틀을 다졌으며, 왕위에 오른 후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의 병합을 꾀하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 능 앞 비각 안에는 비신이 없고, 아래 받침의 구부와 비신의 머리를 장식하는 이수만 남아 있는 능비(陵碑)가 있다. 이 능비는 태종무열왕릉비로 현재 남아 있는 이수와 귀부의 뛰어난 조각으로 널리 알려져 잇는데, 이수는 여섯 마리 용이 서로 얽혀 있고 가운데 부분의 평면에 태종의 둘째 아들인 신라의 명필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로 알려진 두줄 여덟글자 "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내리써져 있으며, 조각의 용모습은 모두 뒷다리를 들어 여의주(如意珠)를 받들고 있고, 귀부는 머리를 치켜들고, 네발을 힘껏 내디디면서 앞으로 갈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거북모습이다. 이 비석은 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무열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비신은 없어지고 지금은 대석이었던 귀부와 비신 위에 얹혔던 이수만 남아 있다. 목을 길게 쳐들고 힘차게 뒷발로 땅을 밀며 전진하는 거북의 모습에서 신라통일 초기의 씩씩한 기상을 볼 수 있어,여의주를 받들어 올린 여섯 용을 새긴 이수와 더불어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는 칭찬이 높다. 그리고 이수에 새겨진 "태종무열왕지비"의 여덟 글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의 글씨라 전한다. 귀부의 길이 333cm,가로 86cm,높이 54cm,이수높이 110cm이다.


김인문 묘<기념물 제 32호>

태종무열왕릉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큰 고분중 큰것이 김인문의 묘이고 다른 하나는 김양의 묘로 알려져 있다.문인석이나 무인석,석수도 없는 간소한 묘이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문무왕의 친동생으로 진덕여왕 5년(651)에 당나라에 일곱 차례나 왕래하며 삼국통일 전후 당나라와의 외교에 큰 공로를 세운 뛰어나 외교관이었다. 묘 주위에는 별다른 석물은 없고 다만 북편에 정, 측면 1칸반의 사모지붕을 한 비각이 있다. 비각의 내부에는 비신과 이수가 없는 귀부가 머리를 앞으로 힘차게 나아갈 자세로 있다. 이 귀부는 1934년 8월 27일 보물 70호로 지정, 보호중이다. 묘는 저경 장축이 23m인 원형 봉토분으로, 높이는 4m내외이며 봉분 저부에는 직경 30cm 내외의 할석이 노출되어 있다.

김양은 무열왕의 9대손으로 통일 신라와 당나라의 화평 교섭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김인문은 글씨도 잘 써 태종무열왕릉 비문을 썼다.  


인증사진(태종무열왕릉에서. 정승진 회원. 이태희 회원. 김성호 회원. 최병윤 회원)

2017년 8월 23일 무더위 속에 경주 일원 답사 여행을 강행하였습니다. 온 몸이 파김치 되고,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즐거운 답사였습니다.

출처 : 대경상록자원봉사단
글쓴이 : 魯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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