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바람을 거역해서 향기를 낼 수 없지만, 선하고 어진 사람이 풍기는 향기는 바람을 거역하여 사방으로 번진다.

각종 모임/대구시행정동우회

영월군 지역 문화유적 탐방 - 정려각•단종릉•단종역사관 등 관람

가야돌 2026. 7. 12. 22:24

 

 

단종릉

1. 조선시대 역대 왕들은 봉분 주위를 감싸는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있는데 여기 능에는 없다. 

2. 왕릉에는  왕을 호위하는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을 함께 세우는 것이 원칙이나 여기에는 문인석만 2기가 있다.

3. 문인석 2기 가운데 장명등이 사각형 옥형(四角屋形)으로 만들어 세웠다.(일반 왕릉의 장명은 8각형)

단종릉(端宗陵 )
장릉의 유래
홍살문 紅箭門 -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 붉은 칠을 한 둥근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 살을 박아 놓았다. 홍문 또는 홍전문紅箭門 이라고도 한다.
엄흥도정려각 旌閭閣 -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고자 1726년(영조 2년) 어명으로 세운 정려비가 있는 비각, 정려비는 1969년 장릉 경내로 옮겨세웠다.

엄흥도정려각 旌閭閣 -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26(영조 2) 어명으로 세운 정려비가 있는 비각으로, 정려비는 1969년 장릉 경내로 옮겨세웠다.

영천 靈泉 - 단종제를 올리는 제정祭#으로 사용했던 우물
정자각 丁字閣 - 능 제향을 올리는 정자 모양으로 지은 집. 제향을 올릴 때 준비된 제물을 진설하고 제향례를 진행
정자각 丁字閣 은 '丁字' 모형으로 이루어졌다. 왼쪽 일부만 보이는 건물은 '수라간(水剌間)'으로서 제향을 지낼때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정자각 입구
정자각 (丁字閣) 내부 - 제물을 진설하고 제향례를 진행
향로·어로 香路·御路 - 왼쪽은 향과 축문을 들고가는 향로香路, 왼쪽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御路
이갑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회원들이 경청하고 있다
동우회원 모두 '국궁사배(鞠躬四拜)'
정면 정자각, 오른쪽 비각은 단종비각 端宗碑閣으로서 단종대왕의 표석을 세워둔 곳, 표석 뒷면에 단종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동우회원 단체 기념촬영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2026 6 25, 대구동우회 회원 81명은 3시간 이상을 달려 강원도 영월군 장릉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오찬을 마친 후 장릉 내 재실에서 제126차 정기이사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이어 단종역사관과 엄흥도 정려각을 관람하며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였고, 홍살문과 향어로(香御路) 중간 지점에 도열하여 이갑순 영월군 문화해설사의 전문적인 문화해설을 청취하였다.

 

  장릉은 일반적인 왕릉 구조와 달리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丁字閣) 'L자형'으로 꺾여 배치되어 있으며, 좌측에는 수라간이, 우측에는 단종비각이 위치하고 있다. 정면의 낮은 산허리에 자리 잡은 단종의 능침은 스님들이 쓰는 바루(식기)를 엎어놓은 모양을 닮은 '발산(鉢山)'을 주산으로 두고 있다. 이곳은 민간과 정사 모두에서 인정하는 천하의 길지로, 태조의 건원릉, 세종의 영릉과 함께 '조선 왕릉의 3대 명당'으로 평가받는 이른바 '노루 명당'이라고 한다. 1457년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할 당시, 한겨울 쌓인 눈 속에서 노루가 앉았다가 도망간 자리만 따뜻하게 녹아 있어 급히 장사를 지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날 문화답사의 하이라이트는 동회원 전원이 동참한 '국궁사배(鞠躬四拜)' 의례. 과거 왕릉 앞 정자각에서 제주가 되는 왕과 대신들이 동서남북과 천지를 향한 경외의 마음을 담아 네 번 절을 올렸던 전통 예법에 따라, 우리 회원들도 해설사의 구령에 맞춰 엄숙하게 사배를 올렸다. 이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방의 신명께 군주의 안식과 국운 융성을 기원했던 거룩한 의례를 직접 체험하는 뜻깊은 기회였다.

왕릉 가는 길
정령송 精靈松 - 단종과 정순왕후의 영혼이라도 함께하는 뜻에서 옮겨심은 소나무
왕릉가는 길(2009. 10. 20 촬영)
단종왕릉(2009. 10. 20 촬영)

 

1. 지리적 위치와 공간 배치상의 차이점

한양 100리 밖, 가장 멀리 위치한 왕릉

  조선 왕릉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한양 도성 밖 10리에서 100리(약 40km) 이내"에 조성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그러나 단종은 영월로 유배되어 승하한 후 그곳에 암매장되었기 때문에, 사후 241년이 지난 숙종 대(1698년)에 이르러서야 공식 왕릉으로 추봉되었다. 이로 인해 강원도 영월이라는,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산릉 지형을 따른 가파른 고지대 배치

  보통의 조선 왕릉은 완만한 구릉이나 평지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반면, 장릉의 능침은 영월군청 인근 산줄기의 매우 가파른 능선 위(경사도 약 65%)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영월의 호장 엄홍도가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급히 양지바른 산줄기에 매장했던 역사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자 모양의 축과 제향 공간의 분리

  일반 왕릉은 진입 관문인 '홍살문'과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 그리고 '능침'이 평지에서부터 일직선(남향)으로 배치되는 것이 전형적이다. 그러나 장릉은 산세가 가파르고 공간이 협소하여 홍살문과 정자각, 능침이 'ㄱ'자 형태로 꺾여 배치되어 있다. 정자각은 평지에 동향으로 앉아 있고 능침은 서쪽 산등성이 높은 곳에 따로 떨어져 있어, 아래쪽 제향 공간에서는 능침이 전혀 보이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2. 능침 석조 구조물(석물)의 차이점

  숙종 대에 단종을 왕으로 복위하면서 능역을 다시 정비했으나, 당시 조정에서는 "이미 오랫동안 묘(墓)로 지내온 터를 크게 헐거나 파헤치지 않고, 추존 왕의 예에 따라 간소하게 조성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 정종의 '후릉'과 세조의 부친인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경릉' 양식을 모범으로 삼아 석물을 제작했다.

 

무인석(武人石)의 부재

  왕릉에는 왕을 호위하는 상징인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을 함께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영월 장릉에는 문인석 2기만 있을 뿐, 무인석이 세워져 있지 않다. 숙종은 정릉(태조 신덕왕후)의 예에 따라 무인석을 생략하도록 명했는데, 후대 사람들은 단종이 숙부(세조)의 군사적 칼날에 왕위를 찬탈당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던 '칼과의 악연' 때문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사각 장명등(長明燈)의 첫 등장

  조선 전기 왕릉의 장명등은 대개 8각형 모양을 띠었다. 그러나 영월 장릉의 장명등은 사각형 옥형(四角屋形)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조선왕릉 역사상 사각 장명등이 최초로 나타난 사례다. 이후 숙종의 명릉을 비롯한 조선 후기 왕릉 양식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병풍석과 난간석의 생략과 왜소한 규모

  보통 왕의 봉분 주위를 화려한 문양으로 둘러싸는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전혀 없다. 봉분을 지키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도 좌우 1쌍씩(총 4마리)만 배치되어 일반 왕릉(각 2쌍씩 총 8마리)의 절반 수준이며, 그 크기 또한 매우 왜소하고 소박하게 제작되었다.

 

3. 장릉만의 유일한 부속 시설

다른 왕릉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장릉만의 독특한 시설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는 공간들이다.

 

충신단(배식단)과 장판옥(藏板屋)

  능역 입구 홍살문 근처에는 단종을 위해 충절을 다하다 목숨을 잃은 사육신, 생육신, 그리고 영월 호장 엄홍도 등 268위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이 마련되어 있다. 왕릉 경내에 신하들의 제단과 사당이 함께 조성된 곳은 조선왕릉 중 영월 장릉이 유일무이하다. 영월 장릉은 예법에 따른 획일적인 왕릉 조성을 따르지 못하고 지형적 한계와 비극적인 역사를 고스란히 품 안으로 수용한 결과, 조선왕릉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애잔한 미를 간직한 능침으로 남게 되었다.

왕릉에서 우측을 내려다 봤을 때 정자각丁字閣 , 영천 靈泉 , 수라간 水刺間(능에 제향을 지낼때 음식을 준비하던 곳)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