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예

불효자의 고향 추억

가야돌 2025. 5. 30. 22:57

고향마을(경북 성주군 대가면 금산리, 웃상삼) : 1978년 5월 - 우리가 살았던 초가집은 수풀 속에 가라워져 있다.
고향마을(1987년 3월)
고향마을(1989년 7월))
옛집터(소가 앉아 있는 자리)1987년 3월
옛집터 마당 끝, 복숭아는 우리 옆집 소유였고 바로 외갓집이다.
이웃집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모습, 멀리 보이는 산 이름은 '금산'이다
우리가 살았던 이웃집(전정철 씨댁)
우리 옛집을 헐리고 마을회관이 들어섰다(지금도 회관은 있지만 미활용으로 폐가가 되었다)
당시 ㅂ어머니를 모시고 마을 사람들과 기념사진 촬영(1987년)
마을 회관 신축 후 우리 가족 방문
마을 입구
부친께서 농사를 지으신 작은 논밭(기금은 무성한 잡목으로 우거져 다닐 수가 어렵다)

 

성주 산골 벽지에서 태어나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해방되던 그때도 물론이거니와 1960년대에도 내 고향 성주는 문명의 혜택이 없는 거의 순수한 산골 벽지였다. 동쪽은 낙동강을, 남서부 경남 합천군과는 가야산이 경계가 되어 낮은 산들이 군 전체를 둘러싼 분지 형태로 자연환경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2017년 현재 성주군은 45천여 명인데 50년대 우리나라 인구가 2천만이라고 하니 성주도 그 당시로서는 2만여 명라고 추측이 간다.

 성주군 성주읍 서쪽하늘 멀리에는 찌를 듯이 솟아있는 짙푸르고 신비로운 가야산이 나타나고 그 산을 바라보면서 대가면소재지를 지나 4㎞를 가노라면 ‘금산리’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오늘까지 나를 키워준 고향마을이다.

 

  일본식민지를 벗어나 8・15 해방되던 그때 나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는데 훗날 말씀으로는 나라가 어수선하고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에 힘든 몸으로 어디로 피난가야할지 밤낮 걱정을 하셨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일본 원자폭탄 투하 등 미일전쟁으로 우리나라까지 영향이 미칠 것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닌가 추측이 간다.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나의 고향은 나지막한 푸른 산들과 그렇게 넓지 않은 들판, 그리고 30여 호가 사는 기와집 몇 집과 오막살이가 나의 무대 전부였다. 물론 전기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고 호롱불도 저녁식사를 끝내고 초저녁에만 밝힌 후 어둠으로 뒤덮이고, 여름이면 어머니 무릎을 베개 삼아 멍석에 누워 별을 헤아리면서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겨울이면 썰매를 타고 눈 내리는 날은 이웃집 형들과 함께 참새 잡는 것이 낙이였다. 시계도 없어 해와 달을 보거나 새벽닭이 울면 시간을 대충 알 수 있었다.

 

  다만 위안이 있다면 뒷산에 올라 높은 가야산을 바라보면서 동무들과 뛰어놀고 산열매를 따먹거나 나물뿌리를 캐먹었고 여름이면 개울에 뛰어들어 목욕하는 것이 낙이였다. 그리고 좀 더 높은 산에 올라가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성주읍이 보이고 밤이면 환하게 불이 밝혀져 항상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마을 앞 들판을 한참 지나면 자갈밭 신작로가 나타나고 고운 채색을 한 버스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하루에 두세 번씩 오갈 때마다 많이 타보고 싶었다.(물론 어린 시절에 몇 번은 타보긴 했다)

 

  60년대 들어서서 성주참외가 재배되어 지금은 전국 참외면적의 75%를 차지하고 동남아, 일본, 유럽 등지에도 수출을 하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  또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경기도 양평에서부터 김천과 성주를 관통, 현풍(2007년 현풍∼김천간 개통)을 지나 경남 창원까지 잇게 됨으로서 성주가 고속도로시대를 맞고 있다.  그리고 2015년 연말에는 산간벽지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성주에서 고령까지 굴곡이 심했던 2차선 도로가 착공한지 10년 만에 4차선으로 확장 개통되어 인구 이동뿐만 아니라 농업물류의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문화유적지와 선비의 고장으로서 생명문화축제가 열리고 장기발전계획이 추진되고 있는가 하면 산업단지에 기업도 들어서면서 농복합도시로 변하고 있다. 이렇게 놀랄 만큼 발달된 지금 해방되었던 그때부터 70년대까지 어렵고 힘들었던 우리 조상들과 모두는 혹독한 시련 속에 한국전쟁까지 겪으면서 모진 목숨을 부지해오지 않았던가.

 

  우리들의 부모님도 오직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본능적인 생활에 집착되어 가슴 아픈 생활사를 겪어야만 했었다. 역사는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생활했으며 우리들을 어떻게 키워왔는가를 태어날 때부터 희미한 나의 과거사를 더듬어보고 형제자매의 이야기도 펼쳐보면서 고인이 된 부모님의 유훈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싶다.

 

한국전쟁의 쓰라린 추억

내가 다섯 살이 되던 1950년 여름, 평화로운 나의 고향에도 비극이 몰아닥쳤다. 그때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나의 눈과 귀로 뚜렷이 보았고 들었던 생생한 증언을 해야 할 차례다.  어느 날 마을 앞 논바닥에 백 명 정도 북한 인민군이 무장을 하고 모여 있다가 집집마다 들이닥쳤다. 한 집마다 5명의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다(이 얘기는 훗날 어머니가 들려주었음) 평화로운 우리 마을도 북한군에 의하여 점령당했다는 증거다. 북한군이 상당기간 머물고 있게 된 이유는 확실치 않았지만 성주를 거쳐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되기 위한 준비기간이라고 추측이 간다.

  평화롭던 우리 마을에 자연히 집집마다 편이 갈리고 완장을 찬 내무서원이 나타나 가족들에게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면 실토를 하게 되고 젊은 장정들은 북한군에 끌려갔다. 고등학교 갓 입학한 형님은 어딘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매일 저녁 완장을 찬 무서운 사람이 예고 없이 들이닥쳐 형님 행적을 다구치곤 했는데 쉰이 넘은 아버지께서는 나를 잡아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 사람은 얼마 전까지도 아버지에게 노인 대접을 깍듯이 했던 동네 사람이었는데 좌익세력에게 뇌세 당한 그 자는 공포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어느 날 나는 동무들과 마을에 있었는데 그날따라 항상 뒤따르던 우리집 큰개가 보이질 않았다. 집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기절할 만큼의 무서운 광경을 보고 말았다. 북한군 서너 명이 마당 끝 참나무에 우리집 개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총대를 휘두르며 때려잡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쏜살같이 달려가 그놈 바지를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죽이지마라, 죽이지마라....” 피범벅이 된 개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깽깽거리다가 뚝 그치고 말았다. 그때 어머니는 그놈과 나의 사이에서 나를 끌어내려고 애를 썼고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그놈은 사정없이 발로 나를 짓밟아 핑게쳤다. 어머니는 그놈들이 행여 총을 나에게 쏘는가 싶어 한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아마도 쏜다고 한다면 어머니는 자신을 쏘라고 말씀 했을 것이다.

 

  나는 오늘 이 나이를 먹을 때까지 잔인한 그 광경을 한 번도 잊어본 일이 없다. 바로 위 누님은 그 북한군의 참혹한 만행을 보고 여태껏 한 번도 보신탕을 먹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 마을 전체 가축들은 많은 죽임을 당했고 심지어 소까지 잡아먹었다고 했다. 집집마다 양식과 가재도구를 탈취했다.

 

  그러나 다행히 낮에는 국군의 세상이었다. 적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폭격기가 나타날 때이다. 그 당시 1만 미터 고공비행을 할 수 있고 최대 566km의 속도로 날으는 B-29는 적들의 지상포로는 사거리가 짧아 속수무책이라고 한다. 왜관 옆을 흐르는 낙동강이 동쪽 20㎞ 정도 위치해 있어 많이도 목격되었고 행여 폭격할가봐 소리가 나기만 하면 즉시 엄폐물을 찾아 숨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8월 13일 동부전선 포항에 돌입한 북한군은 낙동강 도하작전을 위해 10여 일을 두고 4개 사단의 병력을 투입,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몰려들었다. 이에 유엔군은 8월 16일 하루 사이에 B29 99대를 출동시켜 북한군의 집결지인 왜관(倭館)에다 도합 850톤에 달하는 수천 개의 폭탄을 투하했으니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폭격기록이다.(이상 위키백과 참조)

 

  우리 가족들은 전투기가 날아다닐 때 적군이 보이면 그대로 폭탄을 투하하기 때문에 집 뒤 언덕 밑에 방공호를 판 후에 그곳에서 생활을 하였고, 밤이면 방에 들어와 잠을 잤는데도 형님은 오랜 기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가끔 주먹밥을 만들어 어딘가 다녀오시곤 했다. 그리고 낮에 부모님은 끊임없이 날아다니는 전투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건너편 산 중턱에 있는 자갈밭에 올라가 농사를 지으셨다.

  어느 날 누님은 부모님을 따라 밭에를 갔는데 어머니가 숲속을 뒤지니 그곳에 형님이 숨어있었고 얼마를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했다. 부모님께서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데에도 그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농사를 짓는 까닭은 숨어 있는 형님을 보호하고 감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한번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형님께서 부득이 집에를 왔는데 공교롭게도 마을 좌익 세력으로 있는 색출분자가 마당에 일하고 있는 아버지를 만나 형님을 내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형님은 당황하다가 부엌 장작더미 안에 들어가 숨었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불을 지피고 있었다. 그 자는 방안과 농까지 구석구석 뒤지다가 부엌까지 눈을 부라리며 지켜보다가 그대로 밖으로 나가 앗찔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다.

 

  1950년 늦가을 우리나라가 다시 수복되어 제 모습을 찾았을 때 또 한 번 마을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북한군이 점령한 기간에는 좌익세력에 의해 북한군에 끌려갔거나 참형을 당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이제는 북한과의 내통을 했던 몇몇 사람들은 보복적 학살이 자행되었고, 기미를 눈치 챈 자는 월북하여 아직도 생사를 모르고 있다고 한다. 형님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상급생 상당수가 학도병으로 갔거나 북한군들에게 끌려가 많은 희생이 있었다고 한다.

 

  동창 선배님 한분은 재학 중 밤중에 북한군에 끌려가 다부동 전투에 투입되어 수일 동안 작전을 하였는데 있어도 죽고 도망가도 죽는 것은 매일반이지만 도망가다 죽는 것이 대한민국에 떳떳하리라고 생각하고 밤에 도망가다가는 벌집처럼 총탄에 맞아 죽을 것이고 대낮에 틈을 노려 산 계곡을 타고 달려 내려와 아군들이 보이자 두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쳐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졌다고 본인이 직접 실토하였다. 그분은 경북도 교육감을 지냈고 모교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으며 최근에 돌아가셨다.

  그 당시 성주군 내에서 학도병으로 간 학생들은 모두 370여 명이었는데 우리 모교인 성주중고등학교 학도병은 총 61명이었고 지금 생존해 있는 분은 5명에 불과 하다. 2019년 6월 22일 성주중학교 교정에는 6.25 참전 학도병을 기리는 ‘성주중・고등학교 6.25참전 학도병 충훈비’를 건립하였다. 성주중고 총동창회가 주최가 되어 보훈청, 성주군청, 6.25참전유공자회 성주지회가 후원을 하였다. 비문 글쓴이는 성주중고 출신인 상희 님이다.

 

자식들에게 쏟아 부은 교육열

  우리 부모님은 5남매를 길러냈는데 제일 큰 누님이 초등학교 졸업하는 그해 해방을 맞이하였고 나라가 어수선하고 동생들을 보살피다보니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 네 명은 모두 중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내가 가장 즐거웠던 시절은 역시 초등학교 시절이 아닌가 한다. 그 시절에는 매일 학교에 돌아오면 빨리 학교숙제를 끝내고 마을을 휘젓고 다니면서 동무들과 뛰어다니는 것이 일과였다. 그때 어울렸던 갖가지 추억들을 어찌 잊겠는가.

  버들강아지와 진달래꽃 따먹기, 버들피리 불기, 동무들과 말타기, 연날리기, 딱지치기, 개울 멱감기, 땅따먹기, 밤하늘에 별찾기, 눈사람 만들기, 썰매지치기.....  형님은 하루에 왕복 오십리(20㎞)나 되는 성주중, 성주농고에 힘들게 다녔는데 그 고생은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다행히 고교 3학년 1년간은 아버지와 성주읍으로 시집간 큰누님과 협의하여 그 댁에서 하숙하며 통학하게 되었다. 큰누님은 기름값이 비싼 때라 동생이 공부하다 등잔불을 그대로 켜놓은 채로 잠들까 걱정이 되어 무수한 날을 옆방에서 공부하는 동생을 살폈다고 했다.(동네가 성주읍 변두리에 위치하여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음)

 

  어느 날 형님은 큰누님에게 여태껏 공부해온 것이 헛것이고 다시 큰 목표를 세워야 되겠다고 하면서 밤낮 공부에만 매달렸다. 모자는 3년 내내 한 개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학교를 오가면서도,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드디어 형님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아버지께서는 형님의 학비와 생활비를 뒷바라지해야 하는 눈물겨운 고통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송아지 두 마리를 팔고, 다음은 어미소를 팔고, 아무도 사지 않는 산중턱 자갈논만 남겨놓고 논밭도 모두 팔았다. 자형이 학비를 일부 대주기도 했고 봄에 돈을 빌려 가을에 갚는 일도 허다했다. 극심한 가난과 빚더미로 우리 집은 거의 몰락할 지경이 되었다. 형님이 서울에서 대학교 졸업할 때 하숙비를 지불하지 못해 명주이불을 담보로 몸만 빠져나오는 신세였다고 훗날 어머니가 얘기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누님과 나도 오십 리(25㎞)나 되는 중학교에 1학년과 3학년 차이로 다니게 되었다. 누님은 3년 동안 거의 도시락 없이 다녔다. 우리 남매는 시험 치르는 기간 동안만 아침 버스를 이용하였고 새벽길과 캄캄한 자갈길, 달 밝은 밤길을 3년 동안 내내 걸어 다녔다.

 내가 고등하교 다니던 시절은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칠곡군 지천면에 이사를 하여 부모님은 남의 농사를 지으며 학비를 대주셨는데 역시 힘이 벅찼다. 그때 고향집을 팔아 나의 고등학교 입학금을 대주셨다. 누님도 대구에서 자취를 하면서 고등학교를 마쳤고, 얼마 후 8살 아래인 여동생도 신동역에서 대구까지 열차 통학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가을이 되면 3접이나 되는 무겁고도 부피가 큰 삭힌 감을 머리에 이고 지천면 신동역에서 출발, 대구역 인근 번개시장에서 내다판 돈으로 동생 학비를 보태고 있었다. 혼자 가실 때에는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한 번도 내려놓고 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가을장마로 대구역 바닥이 물로 가득 찼고 발을 헛딛는 바람에 넘어져 감이 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참상도 있었다. 어머니는 옷이 흠뻑 젖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누님이 훗날 나에게 얘기를 해주었다. 나는 그때 2년간 월남전에 참전하고 있었다.

 

불효자가 드리는 부모님 전상서

부모님, 1970년에는 제가 직장을 가지고 3년 후에는 결혼도 하여 대구 북구 변두리 집 한 채를 전세 내어 부모님을 모시게 되는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아들 자랑도 하며 모임을 만들고 회비도 거두어 당신께서 그 모임에 회장이 되었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회장은 연장자순으로 하다 보니 회장 감투를 쓰게 되었다고 하셨지요. 저는 그 회원님들의 명부까지 보았습니다.

여동생도 취직이 되어 한집에 살게 되었고 다복한 가정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해가 바뀌어 생활하시는 동안 부모님께서는 뭔가 마음 한쪽에 응어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큰아들이 서울에서 살고 있는데 둘째 아들이 부모님을 모신다는 얘기가 주위에서 나옴에 따라 갈등이 있었지요. 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만 그 말이 형님에게도 감지 되셨는지 제가 2년도 채 모시지 못했는데 서울로 기어코 가시게 되었습니다.

  형님의 직장이 지방으로 발령이 나고 조카 네 명을 뒷바라지 하면서 부모님은 바쁜 서울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서울 출장업무를 끝내고 부모님이 계시는 형님 집에 잠간 들렸을 때 아버지는 저에게 담배 한 보루를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택시 타고 가라고 하시고는 큰길까지 나와 배웅하시면서 차안에 손수건 뭉치를 넣어주셨지요. 차안에서 뒤돌아보니 어머니는 앞치마를 올려서 눈물을 닦는 모습에 저도 소리는 내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손수건 안에는 동전이 소복이 있었고, 집에 와서 담배를 꺼내보았더니 너무 오래 되어 피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 꼭 말씀 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중학교 다니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성주장날 볼일이 있다고 하시면서 저와 만나 돼지국밥을 사 주신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때로는 이십 리가 넘는 먼 길을 걸어 집에 도착하면 캄캄한 밤이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너무 맛이 좋아서 다음 날에는 다시 그곳에 가서 냄새만 실컷 맡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볼일이 있어서 장에 오신 것이 아니라 저에게 고기국밥을 사주기 위해 일부러 오셨다는 것을 최근에 곰곰이 생각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맞지요. 그 추억 때문에 최근에 서울에서 내려온 동생과 장날 그곳에 갔습니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현대식으로 변하여 그 분위기도 없고 맛도 그때만큼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형님 내외분의 극진한 보살핌, 그리고 사흘이 멀다 않고 누님과 여동생의 간호를 받으면서도 오랫동안 투병생활 끝에 영원히 떠나셨습니다. 차가운 2월, 우수 절기를 보내고 제2고향에 잠드신 이튿날에는 그렇게도 가뭄이 심했던 때에 봄을 맞이하는 단비가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우리 모두가 모두 가난하게 살았던 농촌 마을, 논농사가 적었던 산간마을 고향은 어쩌면 그렇게도 못살았을까요. 송기떡도 좋았고 논우렁이를 삶아 넣은 쑥국도 참으로 맛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리를 베고 난 뒤에 논바닥에서 자생하는 모매꽃 뿌리는 매워서 먹기가 어려웠습니다. 찔레순도 많이 끊어 먹었고 잔대 뿌리는 정말 맛이 좋았지요.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제가 태어난 이듬해에 다시 연년생 아기가 태어나게 되었으나 그만 사산하게 되었다고 하셨지요. 저는 가슴 아픈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 하나라도 살리기 위해서... 어쩌면 저는 이 세상을 볼 수 없는 자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한이 하늘에 닿아서 수년이 흐른 후 사랑하는 늦둥이 여동생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꼭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어머니께서는 음식솜씨가 남다르게 뛰어났습니다. 가끔 밀가루 반죽으로 손수 국수를 만드실 때 우리 남매들은 국수를 썰고 남은 꽁지를 꾸어먹기 위해 많이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또한 국수는 그 당시 어떤 집 국수보다도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그러한 가난 속에서도 극진한 자식사랑이 우리 남매들에게는 넒은 아량과, 감사한 마음과, 강한 생활력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어찌하여 무슨 연고로 길고 긴 세월동안 투병생활을 하게 되셨습니까? 서울에 있는 형님과 누님, 여동생과 약속하여 저는 대구에서 상경하여 가족 모두 어머니를 문병할 때마다 무척이나 반가와 하셨지요.

  사실 직장 때문에 자주 들리지 못했는데 저를 볼 때마다

  “왜 이제 오느냐, 너 본지 일 년도 넘었다.”

  이 말씀에 저는 가슴이 메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길었던 35년 직장생활이 모두 끝내고 퇴직하던 해인 2006년 3월 초에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먼 길 가시는 날 여동생은 어머니께서 먼저가신 아버지를 못 찾으실가 봐 노자돈 동전을 듬쁙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를 우리 곁에서 영원히 보낸 후 형님은 우리 남매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고아가 되었구나. 그러나 부모님을 잊지 않는다면 항상 우리 곁에서 지켜주실 게다.”

  부모님! 우리 남매들은 지독한 가난 속에서 평생토록 살아왔지만 사랑과 지혜와 용기를 주셨기 때문에 이 세상 다하는 그날까지 위대한 교훈과 은혜와 감사를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끝)

 

( 2019년 대구시행정동우회 게제 작품)